“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


이일은 이(2x1=2)

이이는 사(2x2=4)

이삼은 육(2x3=6)

...

구팔은 칠십이(9x8=72)

구구는 팔십일(9x9=81)


아이들이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구구단을 외우게 된다. 집에서는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구구단을 외워야한다고 하니까 그냥 외운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외울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너무 어려워 한다. 여러 날 동안 지겨울 정도의 반복을 통해서 구구단을 외울 수 있게 된다. 아이가 구구단을 달달 암송할 수 있어도 처음처럼 구구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제 수학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람들이 때가 되어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다니게 되면 사도신경을 외우게 된다. 목사님, 장로-집사-권사-님 모두가 한결같이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으려면 사도신경을 암송해야한다고 하니까 그냥 외운다.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예배를 참석하면서 사도신경은 곧 암송하게 된다. 사람들은 사도신경이 조금은 의심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신앙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누군가는 구구단과 사도신경의 단순 비교를 보고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구구단과 사도신경은 단순 반복을 통해서 외우게 된 지식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저마다 암송한 지식을 바탕으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심지어 아이들이 구구단을 암송한다고 수학을 잘하는 것이 아니듯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암송한다고 믿음 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초를 놓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구구단과 사도신경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마시라.


구구단과 사도신경, 이것은 우리의 예배와 믿음 생활을 생각할 때 문득 떠오른 것이며, 한 번 점검해보고 싶었다. 현재 우리의 예배와 믿음 생활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교훈을 가르치는 형식적인 예배의 익숙함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안타까운 현실은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신경은 있어야 할 그 자리마저 빼앗기고 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 고백의 기초이며 복음의 핵심이다.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남겨 놓은 신앙의 유산이다. 그들에게 이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그들의 마음이요, 모든 것이요, 생명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사도신경은 한 번의 암송으로 끝나고 마는 단순한 암기물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사도신경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모든 것’으로 고백되어지는 그 날을 갈망해야한다. 그 날의 시작은 우리가 예배에 빠지지 않고 헌금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면서 세상에서는 착하고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는 노력과 열심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가질 때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성경 말씀과 기도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지속적으로 만날 때이다. 그 만남의 시간들이 쌓여가고 깊어지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회개의 기도와 구원의 감사로 이어진다. 기쁨의 예배와 찬송이 터져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구구단 말고 친밀함 말이다. 순서가 중요하다.

(2015.11.4 ©광화문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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